언제부터 내 인생이 얘네들 위주로 돌아갔냐. 내 인생 소망이 예수님 아니고 아스트로 돼서 매일 회개한다. 이게 말이지… 무한하고 영원하신 예수님은 어차피 오실 거고 앞으로 영원히 함께할 거니까 아쉽지 않고, 아스트로는 언제 헤어질 지 모르니까 아쉬운 거다. 내 기력도 한계가 있고, 아스트로도 영원히 활동하진 않을 거잖아? 그러니 예수님, 좀만 참아 주세요.
– 나
내 삶의 소망이 언제부터 얘네들이 되었냐고 한탄한 적이 있다. 농담처럼 유한한 아이들을 볼 수 있을 때 보겠다고, 예수님은 잠시 뒷전으로 미뤄두겠다고 글을 썼는데, 그 말이 현실이 된 것이 슬프다. 정말로 유한한 아이들이었구나 싶었고 정말 내가 얘네들에게 소망을 두었구나 싶었다. 알면서도 아닌 것처럼 열광했다.
조금씩 정신차리고 보니 오늘 찬양 가사가 박혀온다.
세상 소망 다 사라져가도 주의 사랑은 끝이 없으니
살아가는 그 모든 순간이 주 은혜임를 나는 믿네
정말 아스트로가 내 소망이었고, 즐거움이었는데… 이 허망함에서 눈을 돌려 보면 이런 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계신 주님이 보인다. 세상의 죄 때문에 겪는 고통에 울고 있을 때 보듬어 주시고 영원한 소망을 확신시켜 주시는 주님이 내 곁에 있다. 머리로는 떠난 아이 잊는다고 냉정하게 굴어도 마음 속은 여전히 그 아이로 가득 차 예수님이고 현생이고 아무 것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때 주님은 날 여전히 그렇게 바라 봐 주신다. 내 모든 순간을 지켜 주신다.
그 끝없는 사랑에 기대어, 그 품에 안겨 소리내어 운다. 부끄러워도 온전히 나를 내어놓을 곳이 주님밖에 없어서 빈을 향한 마음을 끌어안고 주님 앞에 나아간다. 빈이에게 쓰던 의연한 편지 내용이 주님 앞에서 얼마나 허세인지…
괜찮을 수 없고, 아프지 않을 수 없다. 돌덩이 하나 가슴에 얹은 것처럼 있다가도 ‘빈이 네가 뭔데?!’ 싶어서 기운내 보지만, 상실이란 게 쉽게 극복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럴 때 다시금 내 모든 순간을 주관하시고 날 떠나지 않으시는 주님을 바라본다. 그 얼굴에 빈이가 겹쳐 보여도 말이다. 만약 빈이와 내가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이 덜 힘들까. 아님 지금의 애통함의 정도는 모두가 겪는 것일까.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슬퍼하고 있을까.
내 계획대로라면 빈이가 떠난지 50일째 되는 오늘은 jubilee여야 하는데, 역시나 그것도 내 뜻대로 되나. 언젠가는 확신을 가지고 기뻐할 날이 오겠지. 빈이를 다시볼 수 있다는 확신에 희년을 산포할 날이 오겠지.
내게는 영생의 소망이 있다. 부활과 회복의 확신이 있다. 언젠가 예수님이 모든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잠든 자들을 깨우시고 우릴 부를 날이 올 것을 믿는다. 그 확신이 주님 사랑의 확증이다. 그날을 향한 내 하루하루가 주님의 은혜로 산다는 방증이다. 그러니 지금 괴로운 거는 괴로운 대로 지나가게 두련다. 보고싶은 마음 보고싶은 대로 내버려두고 마음껏 그리워 하련다. 그러나 지금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원망은 품지 않으련다. 다시 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니 말이다. 이게 내 진정한 소망의 일부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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