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초 정말 충동적으로 예매했다. 예스24에 뜬 고양이가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 내 주말은 이미 진진이가, 주중은 업무 외 시간은 덕질 블로그/유튜브 한다고 모든 시간을 다 쓴다. 덕메들과 쓰는 시간도 상당하다. 즐겁다. 같이 여전히 아이들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그냥 그들과 관계없는 걸 즐기고 싶었다. 평범한 거. 물론 시작부터 실패했다. 빈이 생각하며 예매했고, 덕메랑 동행했으니.

솔직히 별로 빈이 안 닮았다. 산하와 더 닮은 것 같다. 눈 똥그랗게 뜨고 입도 작은 게 말이다.



생계를 위해 삽화가로 산 루이스 웨인 일생은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다. 말년도 그나마 좋은 병원에서 죽음을 맞았다 정도였다. 그의 그림은 정말 생계를 위함이었기 때문에 명화라고 할 순 없지만, 꾸준히 그려 온 고양이에게서 그의 세심한 관찰력과 고양이를 향한 사랑이 보였다.

특히 크리스마스 특집호에 실린 150여 마리의 고양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고양이를 정말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미국에서 위의 글과 같은 편견을 본 적이 있다.

예쁘지 않고 성공하지 못한 노처녀(≠골드미스)는 집에서 외롭고 구질구질하게 살며 고양이를 여러 마리 키우며 걔네들에게만 애정을 쏟는다는 식으로 풍자한다. 왜 굳이 고양이인지는 모르겠다. 강아지는 괜찮나…?

삽화로 들어간 고양이 그림들은 묘소라고 해도 될만큼 디테일이 상당했다. 표정만 조금 과장해서 그렸을 뿐. 그 많 은 고양이 사이에서 강아지 그림도 찾았다. 배볼똑한 것이 아무래도 성견이 아닌 3-4개월 강아지들 같다. 비율도 짧고. 루이스 웨인은 관찰력이 좋은 삽화가인 건 맞는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떠도 산하 닮았는걸. 하지만 분위기는 미니3집 autumn story 때 장난기와 닮았다.


쫄딱 젖은 고양이 두 마리

이건 그냥 뒷모습이 사고치러 가는 울 똘이랑 닮았다. 귀여워 귀여워.

아세 족구가 생각나는 색감


막냉이가 저러는 건 언제나 반갑지.

옛날 표현으로 루이스 웨인은 언청이었다. 그래서 소위 왕따였지만 그럼에도 자라면서 은둔 생활은 하지 않았다. 다양한 것에 관심이 있었으며 그것을 자기가 그리는 고양이에 반영했다. 은밀하다고 하지만 그닥 은밀하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환상 속의 일인 것은 맞는 듯 하다.

나름 만족하는 전시다. 2층 전시관 앞에서.



뭐, 피아노는 은밀하게 치고 집청소는 안 은밀한 일상인가…

얘가 어떻게 일상이냐고. 이게 더 환상이나 은밀 쪽 아닌가. 큐레이션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경제 생활이 순탄치 않고, 다섯 여동생들은 결혼해서 독립한 것 같지도 않고, 그 중 한 명은 아파서 죽기까지 했으니 그가 마음의 병을 얻었다는 게 이상하지는 않다. 이때 사랑하는 아내라도 있었다면 의지하고 버텼을지도 모르지만, 아내도 일찍 떠나고,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가족은 아내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숨만 쉬어도 살아지는데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는 말이 가슴에 콕 박혀왔다. 숨만 쉬어서 살아지는 건 맞지. 죽지 않지. 근데 그렇게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고 끊임없이 되묻는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 내가 살아있는다고 가족의 생계가 해결되지 않는데,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그 무게가 나에게서 벗겨지지 않는데. 그림을 그려서 원하는 만큼 수익이 나지 않는데…
예전에 자영업을 할 때, 그리고 요즘 뉴스를 보면서 그 때 그 암담함을 다시 느낀ㄷ. 현금이 돌아야 버티니까, 손익은 마이너스라도 매출이 있어야 은행 대출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손해를 보면서도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고, 그달 그달 모자란 돈은 또다시 빚으로 남고 만다. 그렇게 살아서 뭐하나. 내가 가만히 있으면 살아는 지는데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열심히 벌어서 뭐 하나, 싶을 때가 있었다. 하고 싶은 일에 대해 고민할 수 없었고,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에 의지해서 또 하루를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거 아니면 뭐 하지?라고 물었을 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루이스 웨인은 그래도 병원에라도 입원했지, 많은 사람들은 그러지도 못한다. 물론 많은 다른 사람들은 그처럼 괴짜같지도, 그처럼 먹여살릴 식솔이 많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그랬으니. 하지만 나 하나도 벅차던 때, 그게 다 무슨 의미람.

그럴 때 나에게 삶의 의미를 주는 한 마디가 필요했다. 에밀리가 웨인에게 한 말처럼. 나는 그 한 마디를 내 곁의 소중한 사람에게서 듣지 않았다. 그때는 모두가 힘들어서 서로가 서로의 문제를 외면하기 바빴다. 하지만 절박하던 순간, 나에게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해 준 계기가 있어서 감사하다. 지금 당장의 삶의 목표를 잡아나갈 수는 없었지만, 하루하루를 버티고 살아가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런 감성적이고 은유적인 말은 들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수번의 예언기도를 받고 위로를 받아도 내 안에 확신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저 대사가 진짜 에밀리가 했던 말이라면 그래도 부럽다. 그런 말을 해 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게.


그때 이후로 웨인의 고양이는 묘사가 단순화 되고 더 그림 같은 성향이 짙어진 것 같다. 그리고 때맞춰(?) 직물가였던 어머니의 영향력도 발현했다. 아마 더는 상업용 그림이 아닌 자기가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어서가 아닐까 싶다.


아마 우리가 좋아하는 건 그의 말년의 그림인가 보다. 조금 더 귀엽고, 색채가 짙고,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고양이들 말이다.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떤 그 고양이들을 좋아하는 것 아닐까.

에밀리의 대사는 상투적이다. 잔소리같다. 하지만 맞는 말이다. 결국은 본인에게 달렸다. 웨인은 정신병에 걸렸을 지언정 끝까지 작품활동을 했고, 여생을 무슨 왕실 병동인지에서 마쳤다고 한다. 웨인의 삶 전체를 봤을 땐 명성과 고난을 함께 겪었지만, 그래도 잘 산 삶이지 않았을까 싶다. 버겁고도 힘들었지만 자기가 관찰하고 사랑했떤 고양이 만큼은 원없이 그리다 갔으니.





요기조기 포토스팟은 많았고, 체험할 것도, 굿즈도 있었던 알찬 전시였다. 고양이보단 개가 더 좋은 내가 고양이를 즐길 방법이라곤 아스트로와 연상시키는 것 뿐이었지만, 마지막까지 문양이를 그린 참덕후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그의 아스트로 (중 문빈을 향한) 사랑의 뚝심은 참 두텁다.
삶에 대해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던 전시였다. 원하는 빈이 생각은 많이 하진 못했다. (실은 중간중간 끼워 넣은 아스트로 사진도 나중에 집에 와서 찾은 것일뿐, 막상 그림 감상할 때는 연상도 못했다.) 웨인의 고양이는 잠시의 위로였다. 충분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