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에 고객들을 모시고 상품 소개 및 간담회를 하는 날이었다. 끊임없이 준비를 했는데도 쫄려서 주말에 가족여행도 안 가고 혼자 집에서 들여다봤는데도 부족한 느낌이었다. 긴장했는지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쓰고 연습하고 읽고 고치기를 반복했다.
준비하느라 아무 것도 못 먹은 나는 10시에 도서전이 열리니 옆 카페에서 9시 50분에 타이차 버블티를 시켰다. 세상에나 10시 10분에 버블티가 나왔는데 버블이 없다. 버블값을 받았는데… -_- 귀찮아서 그냥 먹었다.
도서전에 들어와서 생각해 보니, 아차 10시에 고객 미팅 있지!!!! 15분에 부랴부랴 고객이 운영하는 부스 쪽에 와서 인사를 했다. 대표만 만나는 줄 알았는데 직원 셋까지 줄줄이 따라왔다. 앗… 쪽수가… 그리고 미팅을 시작했다. 우리 상품 카탈로그와 대표 상품을 들고 설명하는데, 결과적으로는 개같이 깨졌다. ㅋㅋㅋㅋㅋ 영업쪽에서 나의 허술함이란 진짜 차원이 다르다. 그러나 관심은 가져 줬고 자기들이 원하는 제안을 해 줘서 내가 고민해 볼 여지는 있겠다.
금요일과 토요일에 진행할 추첨 준비를 하느라 일반 서점 부스를 찾았다. 한국 소설 섹션이 따로 있었다. 서울 도서전처럼 와글와글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동선이 너무 비효율적이라 이리저리 사람에 치였다. 하지만 한국처럼 도서 정가가 없으니 사람들이 트렁크를 들고 와서 할인가에 책을 쓸어가는 걸 봤다.
우리 상품은 이제 막 시장에 진입하려고 하는 터라 수요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알아보고 관심 가져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객이나 방문객이 여자라면 언제나 나를 보고 미소 지으며 이런다. “I’m so~ into K-Drama!!” ㅋㅋㅋㅋㅋㅋㅋ 내 상사들이 원어민 영어와 전문성을 갖췄다면, 난 한국 드라마, 한국인 버프를 받아 영업을 했다. 일단 친해지기엔 드라마 수다만한 게 없지.
특히 협력사 사장 부인(=사모님)은 “사랑의 불시착 너어어어~~~무 재밌어요! 관심 없다가 손예진, 현빈이 결혼한다길래 어떤 드라마였길래 사귀나 해서 봤는데 헤어나오질 못해요!”라고 함 ㅋㅋㅋㅋㅋㅋㅋ “한국인은 왜 그리 하얘요?”라는데 동아시아인이 하얀 건 뭐… 내들은 아나요… ㅋㅋㅋㅋ 나 사불 보러 일본까지 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덕밍아웃은 참아야지.
상사 1, 2를 오후에 만났다. 잘 잤냐고 물으니 상사 1은 “나 어제 돌아가서 운동하고 완전 뻗었어”라면서 싱글벙글 했고, 상사 2는 “시차 적응이 안 됐어”라고 했다. 미팅 준비한다고 구두를 신었다고 둘 다 엄청 징징대기 시작했다. “I hate dress shoes!”를 몇 번이나 듣는 건지…. 실은 나도 플랫 신고 안 쓰던 발 근육에 무리가 와서 너무 힘들어서 함께 징징댔다. 아이고~~~~~!!!! +_+
상사 1, 2는 힐튼에 묵고 나는 콘래드에 묵고 있다. 전일 체크인하면서 보니 콘래드도 힐튼 계열이었다. 상사들이 힐튼에서 묵는 이유는 힐튼 포인트를 쌓으려고 하는데, 힐튼은 도서전에서 2킬로미터 떨어져 있어서 이동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상사에게 말했다. “담에 필리핀 도서전 올 땐 콘래드에서 묵어, 여기도 힐튼 계열이더라고.”
상사 눈이 동그래지면서 “NO WAY!!”를 외치더니 상사 2에게 “넌 알았어?”란다. 상사 2는 “어, 근데 네가 거기 예약했다길래 나도 그냥 따라 했어. 나중에 준이 콘래드 묵는다길래 왜 쟤만 특별대우야? 했지.” 어, 감사하게도 내가 예약할 땐 힐튼에 방이 없더라공.
그러더니 상사 1, 2, 전임자 모두 콘래드로 바꾼다고 여행사에 전화하기 시작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결과적으로 상사 2는 숙소 변경에 실패했다.
미팅에 왔다. 3시에 시작이라는데 10명도 오지 않았다. 어… 망한 건가? 최대 30명 초대했는데…? 협력사가 좀 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상사 2는 “교통 상황 겪어 봐서 아는데 이해합니다”라고 쿨하게 답했다. 넌 알아야지… 네가 운전했으니까.
기다리고 기다리다 20분이 지나니 사람들이 모두 왔다. 그리고 한 명씩 발표하는데, 이 기독교 문화, 특히 북미 쪽은 자기 소개를 할 때 자기 가족 소개를 엄청 한다. 앞선 세 명이 애가 몇이고, 내 와이프는 필리핀 사람이고, 얼마나 이 회사에서 있었고 얼마나 뭘 좋아하고 떠벌떠벌하고 발표를 하는데 난 할 말이 없었다. “어, 저는 June이고요, 전 결혼을 안 해서 부모님과 살고 있고, 동생은 싱가포르에서 필리핀 친구들과 잘 지내고 있답니다.” -_-;;
상사 1, 2, 전임자는 모두 달변가들이다. 그러나 상사 2가 자기 소개는 유려하게 해 놓고는 핸드폰 대본을 읽으면서 발표하는 게 아닌가!!! 아싸, 나도 그럼 대놓고 읽어야지!!! 했는데 진심 잘 읽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65분 계획한 미팅은 20분 딜레이에 1시간 반을 채웠고 이후 이어지는 저녁식사에 참석자들과 어우러져 저녁을 먹었다. 어쩌다 보니 할아버지 참석자들이 있는 자리에 앉았는데 하는 조크가 언어만 다르지 우리 아버지랑 똑같았다. ㅋㅋㅋㅋㅋㅋㅋ 아버지 또래 맞으시군요. 필리핀도 일본 침략을 겪었기 때문에인지 서로 문화를 나누는데 일종의 동질감을 느꼈다.
아 맞다. 상사들은 비즈니스 캐주얼이라고 셔츠, 자켓, 청바지를 입었고, 난 귀찮으니까 원피스, 참석자들은 한국에서 동네 아저씨가 입을 법한 차림을 하고 오셨다. 기본 셔츠, 재킷, 그리고 나일론 바지. 그랬더니 상사들이 긴장해서 “와… 너무 차려입으셨는데…?” 풋, 뭐래니.
밥은 맛있었다. 간만에 간간한 찰밥에 고기 먹으니 난 좋았는데 상사 1, 2와 전임자는 제대로 못 먹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2차 가자고 했다.
“어디 갈래? 수다 떨게 디저트?” 이랬더니 전임자가 “여기 끝내주는 한국 고깃집이 있어!” -_-? 응? 필리핀까지 와서? 근데 상사들이 “오 예~~”이렀다.
내 호텔 근처 고깃집에 왔다. 내가 한국인이니까 나에게 맡긴다던데. 소고기 세트를 시켰다. 실은 난 배불러서 그냥 고기를 구워주기 시작했다. 내가 어디 가서도 남의 고기 안 구워 주는데 말이야 쯧…. 그리고 고기도 한국만 못해서 (당연하겠지만) 먹기 힘들었다. 근데 상사들은 참 잘 먹더라. 진짜로 싹다 긁어 먹었다. 먹으면서도 수다는 진짜 1초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상사도 피곤했는지 “야, 밤이 너무 늦은 거 같은데 8시밖에 안 됐어! 나 너무 피곤해!”라고 한다.
집에 가는데 또 그런다. “데려다 줄까?” 대놓고 말했다. “어제 너네들 헤매는 거 봐선 나 혼자 가도 될 것 같아. 내 걱정 마, 모르면 길 물어볼게.” 미국 애들은 쿠사리를 먹으면 참 좋아하더라. 농담인 줄 아나 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자마자 씻고 정리하고, 들고 온 마사지 건으로 다리랑 허리 좀 조지고 나니 그대로 기절.
아… 그나저나 오늘부터 상사들과 같이 호텔로 퇴근하게 생겼네… 멀리 있어서 심리적 안정이 있었는데…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