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는데 부장이 팀장과 나와 함께 식사하자고 했다. 표면적으로 관계가 나쁜 것은 아니니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다만, 그 사람은 어떻게 나와 있었던 일을 별 일 아니었던 것처럼 생각할까 싶었다. 하지만 또 그렇게 자기 포장을 잘해 온 사람이라면 티를 내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끝까지 자기는 마음이 좋은, 다만 몸이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퇴사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도록.
부장의 말에 따르면, 윗선(본부장 등)에서 “빨리 날짜 정하고 나가라”는 식으로 재촉하고 있다고 한다. 3월까지 여유롭게 인수인계할 생각이었지만 회사는 질질 끌 거 없이 남은 휴가도 소진하고, 2월 말까지만 나오라고 했다. 부장은 작년부터 조금씩 인수인계를 해 왔고(YB, Sua, HH 등), 이제 남은 업무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본부장은 “인수인계도 내가 할 테니 서면으로 보고하라”고 했다고 한다. 부장은 이에 어처구니없어했다. 확실히 본부장이 모든 업무를 직접 맡을 수는 없을 텐데, 무슨 생각인지 싶었다.
부장은 회사가 꺼지라는 듯이 쫓겨나듯 퇴사 절차를 밀어붙이는 것에 심란하다고 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그는 쫓겨나는 것이 맞다. 내가 그의 퇴사 사유를 모를 거라고 생각해서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회사에서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으면 그렇게 재촉하겠나.
점심을 먹으러 나서면서부터 부장은 퇴사 후 본인이 원하는 대로 인사 발령이 나길 바란다는 말을 했다. 그가 정상적으로 퇴사하는 상황이었다면 그의 의견을 귀담아들었겠지만, 지금은 “자기가 뭔데 이런 말을 하는 걸까”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맡았던 팀장을 내가 맡고, O 팀장이 부장과 본 팀장을 겸직하는 구조가 가장 안정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애들도 다 그거를 상상하고 있더“ 라면서 자신만의 생각이 아님을 강조했다. 나가는 사람이 말이 많다.
어쨌든 공식적인 퇴사일은 3월 7일로 정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마지막 출근일은 2월 28일 정도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번 달 매주 월·화는 휴가를 쓰고, 수·목·금은 출근하겠다”라고 했고, 최종적으로 2월 말까지 자리 정리를 끝내고 3월에는 남은 연차를 소진할 계획이라고 한다. 몸이 좋지 않다는 건 이해하지만, 끝까지 주 3일 출근하겠다는 태도가 못마땅했다. 게다가 주 3일 연속 오전 출근이 가능하면서도 이제껏 이렇게 띄엄띄엄 일해 온 것이 대조되어 더 괘씸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그가 아토피가 심하다는 말은 들었고, 지난해 2주간 무단결근한 후 나타났을 때 몰골이 말이 아니었던 것도 기억난다. 하지만 그 외에 건강 상태가 정확히 어떤지는 들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물어봤더니, 피검사 결과 혈액 수치가 정상의 절반도 안 되고, 간암 수치도 비정상적으로 높다고 했다. 이에 더해 아토피가 심한 데다 불면증도 있어서 아침에 일어나기도 힘들고, 피부는 찢어질 듯 아팠다고 한다. 운동 부족으로 근육이 줄어 그나마도 모자란 혈액이 제대로 순환되지 않아 아토피 같은 면역질환도 쉽게 낫지 않고 다리가 아프니 운동은 더 못하게 되는 악순환이었다고 한다. 사촌이 의사인데도 방치한 것을 보면, 치료가 시급한데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철분제도 제때 먹지 않고 자가용을 사서 하루 운동량을 더 줄여버리는 악수를 뒀다.
그동안 어떤 치료를 했냐고 물어보니, 근본적인 치료나 재활이 아니라 단순히 증상을 완화하는 정도의 치료였다고 한다. 예를 들어, 침을 맞아 다리가 조금 편해지면 출근하고, 그래도 힘들면 쉬었다는 식이었다. 아무리 들어도 우울증으로 인한 회피 본능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었다. 상황은 안타깝지만, 그럼에도 동정하기 어려운 부분은 그가 그간의 회사의 호의와 제안은 다 뿌리치고 자기가 원하는 조치만 요구했다는 점이다.
2주 무단결근 후 회사는 그의 건강과 업무 부담을 고려해 ① 요양을 위한 무급휴직 또는 ② 부장직을 내려놓고(월급 삭감) 재택근무 전환을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둘 다 거부하고 이사 앞에서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당시 경영본부 사람들은 모두 그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얻은 배려가 주 2회 오전 반차(유연근로 대체)였다. 회사는 심지어 그를 위해 내년도 연차를 당겨 쓸 수 있는 한도를 기존 50%에서 70%까지 늘리는 내규 변경까지 감행했다. 그런데도 그는 20주년 포상으로 받은 여행 상품권을 유급휴가로 바꿔줄 수 있는지까지 요청했다. 이에 경영본부는 “그런 제도가 없다”며 거절했지만, 그는 “누가 그런 제도가 없는 걸 모르냐, 만들어 달라는 거 아니냐”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동안 회사가 베푼 배려는 기억하지 않고,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은 것만 서운한가 보다.
팀장은 진짜 마음이 여린지, 아님 이렇게 된 것에 있어 일말의 미안함이 있는 건지 부장을 걱정했다. 내가 무정한 걸까? 난 왜 이렇게 안 불쌍하지? 그리고 그게 우리가 걱정할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무연고 과부도 아니고, 가족도 있는 사람인데, 그를 챙기는 건 가족의 몫이다. 만약 내가 그와 그의 치부를 공유했다면 인정으로 불쌍하게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모르는 줄 알고 여전히 위선을 떨었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수긍하는 척 연기하고 나니 감정이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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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팀장과 나는 본부장과 면담을 했다. 조직 개편과 인사안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인수인계에 대한 본부장과 부장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본부장은 부장에게 “인수인계 목록을 먼저 제출하라”고 했지만, 부장은 독자적으로 여기저기 개별적으로 인수인계를 진행 중이라 아직 목록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본부장 입장에서는 “퇴사하는 부장이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새 리더가 (현재로선 없으니 본부장이) 분배해야 하는 것”인데, 부장이 독단적으로 일일이 나눠주고 있다고 한다. 그런 행동이 밉보여서 더더욱 부장을 내보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본부장은 부서 운영 방안을 공유했다. 우리는 세 번째 안을 제안했다.
① 기존처럼 팀을 유지하고, 본부장이나 팀장 중 한 사람이 부장이 맡던 팀을 겸직하여 관리하는 방법.
② 두 팀을 하나로 통합해 예산과 인력 관리를 간소화하는 방법(업무 축소 없이 서류상 통합).
③ 기존 팀을 유지하면서 부장이 맡았던 팀의 팀장으로 나를 세우는 방법.
부장과 나는 세 번째 방안이 더 안정적이라고생각했고 나 또한 새 역할을 해볼 의향이 있었다. 웹 서비스 기획 쪽의 업무 지식이 부족하지만 그것은 O 팀장도 마찬가지이므로 내가 가서 습득하는 게 더 빠르다는 판단이다. 또한 나의 근속 년수도 생각하면 리더 경험을 쌓을 때도 되었다. 동시에 퍼블리싱 담당과 부장의 행정업무를 인수인계 받은 YB도 부팀장으로 승진해 같이 팀을 꾸려나가면 큰 문제없이 유지 될 거라고 여겼다. 본부장도 같은 의견이었다. 다만 최종 결정은 이사가 하게 될 것이며, 승인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부장이 본부장이 혼자 다 하려고 한다는 뉘앙스로 내가 팀장이 되는 그림이 자기 아이디어이고 자기가 처음 추진한 것처럼 얘기했던 게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왜 자꾸 그렇게 느낄까. 그가 내 승진을 바란 게 진심일 수도 있는데.
솔직히 말하면, 부장이 없어도 회사는 잘 돌아갈 것이다. 지난 1년간 그의 부재가 반 이상이었을 때도 그랬다. 이제 그는 회사 걱정 없이 자신의 건강을 잘 챙기고 회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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