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토요일 저녁
토요일 저녁에 연락이 왔다. 우리 회사 플랫폼에 타 출판사에서 낸 책 한 권이 올라가 있는 것이 문제가 됐다. 우리 회사와 관련 있는 교회 담임목사가 우리 대표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냈다. 책의 여러 저자 중 한 명이 동성애를 옹호하는 단체와 연관이 있다는 게 논지였다. 책의 내용 자체는 신학적 문제가 없었다.
전해 들은 메시지의 요지는 이랬다.
“이 책이 우리 플랫폼에 올라가 있습니다. 전체적인 점검이 필요해 보입니다.”
“전체적인 점검”이라고 썼지만, 받는 쪽에서는 “검열이 필요하다”는 말로 읽혔다. 게다가 그 책은 3년 전에 올라온 것이었다. 토요일 저녁에 대표에게 전화가 오고, 담당자들은 부랴부랴 움직였다.
부장님과 나눈 이야기
소식을 전해준 건 부장이었다. 한참을 같이 분개했다. 출판사도 아닌 다른 기관의 사상 검증까지 해야 하느냐, 3년 전 책을 이제 와서 문제 삼는 기준은 무엇이냐, 들여다보면 결국 특정 정치 노선과 맞물려 있는 것 아니냐 —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우리 둘 다 동성애가 죄라는 데는 동의한다. 연관된 기관의 입장을 옹호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화가 났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포용력이 없다는 것이, 공감 없이 편협하게 굴다가 결국 외면받는다는 것이 슬펐다. 6월을 새 마음으로 시작하려 했는데, 종일 머리가 아팠다.
내가 느끼는 문제점들
감정과 사안은 분리해야 하니까, 차분히 정리해 봤다. 이 일은 한 덩어리가 아니라 여러 층위로 나뉘었다.
첫째, 권리의 문제. 우리 회사는 그 교회와 별개의 법인이고, 별도의 대표(원장)가 있다. 그 교회는 우리와 협력 관계에 있는 여러 기관 중 하나일 뿐이다. 물론 그 입김을 무시할 순 없지만. 그렇다면 “그 교회 담임목사”라는 직위 자체만으로는 우리 콘텐츠를 어떻게 할지 결정할 권한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 공식 직책이 없는 사람으로부터의 요구는 거버넌스 행사가 아니라 영향력의 행사 — 즉 외압에 가깝다. 그러니 그의 연락을 “사상 검증”으로 읽은 건 감정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맞는 독법이다.
둘째, 정체성의 문제. 이 부분이 사실 더 문제라고 보인다. 우리 회사는 스스로 초교파(non-denominational) 복음주의를 표방한다. 초교파라는 건 정의상 한 교단, 한 교회의 노선을 콘텐츠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특정 교회의 검열 기준을 상시 체제로 받아들이면,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표방하는 정체성과 정면으로 모순된다. “그가 그럴 권리가 있느냐”보다 “이것이 우리가 표방하는 바와 충돌하느냐”가 더 근본적인 질문이다.
셋째, 형식과 비례성. 협력 기관이 특정 책 한 권에 대해 “이건 우리 신앙고백과 충돌하니 검토해 달라”고 정식으로 제기하는 건 정당한 채널이다. 반면 자기가 거버넌스를 갖지 않은 기관에 “전체적인 점검”, 사실상 상시 사상 검증 체제를 요구하는 건 채널과 비례성 양쪽에서 무너진다. 우려를 제기하는 것과 검열 체제를 요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넷째, 일관성. 이 책은 내용 자체에 신학적 문제가 없었다. 그러니 걸린 것은 콘텐츠가 아니라 한 공저자의 외부 단체 연루, 곧 연좌(連坐)였다. 그렇다면 물어야 한다. 우리는 플랫폼에 올리는 모든 책의 모든 저자와 역자, 추천인의 사회·정치 단체 소속을 검증하는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진화론에 우호적인 창조론 입장을 취한 저명한 복음주의 신학자 팀 켈러의 책은 같은 플랫폼에서 아무 문제 없이 추앙받는다.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읽지 않는 그의 신학적 입장도, 그가 몸담았던 단체들도 우리는 굳이 들여다보지 않는다. 유독 이 한 사람의 한 소속만 문제가 된다면, 진짜 기준은 일관된 검증 원칙이 아니라 그 사안이 지금 정치적·문화적으로 뜨거운가 여부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느낀 불편함의 근원이 여기였다.
다섯째, 그래서 내가 진보적인 것인가. 아니었다. 적어도 교리에서는. 나는 동성애가 죄라는 입장에 동의한다. 그것은 보수적인 입장이다. 내가 불편했던 건 그 교리가 아니라 (1) 검열, (2) 과잉과 비례성 상실, (3) 교리 정통성과 당파 정치의 결합이었다. 이 셋 중 어느 것도 “진보 신학”이 아니다. 정죄에 반대하는 것과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고, 나는 후자로 넘어간 적이 없다.
결론: 두 개의 질문
이 일은 결국 두 개의 질문으로 남았다.
하나. 우리 회사는 무엇을 기준으로 타 출판사의 책을 들여 서비스해야 하는가.
먼저 정해야 할 건 우리가 출판사인지 유통자인지다. 우리가 직접 만든 콘텐츠라면 신앙고백에 더 엄격할 수 있다. 하지만 남의 책을 들여 서비스하는 플랫폼이라면, 그건 큐레이션(편집 판단)의 영역이지 신앙 검열의 영역이 아니다. 그리고 그 큐레이션 기준은 외부 압력이 아니라 우리 내부 기준에서 나와야 하고, 한 이슈에만 가위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일관되게 적용돼야 한다.
그런데 이번 일은 더 근본적인 갈림길을 드러냈다. 우리는 작품을 그 내용으로 판단하는가, 아니면 저자의 외부 소속으로 판단하는가. 책의 내용에는 문제가 없었고 걸린 것은 한 공저자의 연루뿐이었으니, 이번에 적용된 잣대는 사실상 연좌였다. 그러나 소속을 기준으로 삼으면 끝이 없다. 모든 공저자와 역자, 추천사 한 줄을 쓴 사람의 정치·사회 이력까지 검증해야 하고, 그 검증의 칼날은 결국 그때그때 시끄러운 이슈를 따라 움직인다. 연좌는 기준이 될 수 없다. 기준은 책 안에 있어야 한다.
“들이지 않기로 판단하는 것”과 “외압으로 사후에 들어내는 것”은 다른 일이다. 전자는 정당한 편집 책임이고, 후자는 사상 검증이다. 초교파를 표방한다면, 핵심 교리의 경계는 지키되 열린 영역에서는 다양한 관점을 견디는 것이 오히려 정체성에 충실한 것이다.
둘. 나는 내 기준을 잘 붙들고 있는가.
내 교리 입장은 변함없다. 동성애가 죄라는 것에 동의하면서, 동시에 정죄와 검열, 당파 정치와의 결합에는 반대한다. 이 둘은 구분되어야 한다. 포용력 없음에 대한 내 슬픔은 진보로의 이탈이 아니라, 복음주의 내부에 일관성과 은혜를 요청하는 마음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한다. 이번 일에서 책의 내용은 — 내 기준으로도 — 문제가 없었다. 그러니 내가 지켜야 할 경계는 “검열에 반대한다”가 아니라, 작품을 그 내용이 아니라 저자의 소속으로 재단하지 않는 것이다. 한 사람의 연루를 근거로 그가 쓴 정통적인 글까지 함께 묻어버리는 잣대 — 그것이 내가 거부해야 할 기준이다. 내 기준을 붙들고 있다는 건, 작품은 작품으로 판단한다는 원칙을 끝까지 지킨다는 뜻이다.
기준을 잃은 건 누구였을까. 어쩌면 그 질문이 이 글의 진짜 제목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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