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지러움에서 시작됐다
시작은 어지러움이었다. 그냥 피곤한가 보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일어설 때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래서 동네 내과에서 피검사, 흉부 엑스레이, 심전도, 소변검사를 한꺼번에 받았다.
다음 날 나온 결과가 예상보다 나빴다.
- 헤모글로빈 8.6
- 페리틴 10.6
실혈로 인한 철결핍성 빈혈. 즉 어딘가에서 피가 계속 새고 있다는 뜻이었다. 의사는 빈혈을 방치하면 심장이 무리하다가 장기적으로 비대해질 수 있다고 했고, 당분간 운동을 쉬라고 했다. 주 4회 하던 유산소와 PT를 그날로 멈췄다.
혈당이 살짝 높고 고지혈증이 경미한 것 외에 갑상선과 심장 지표는 정상이었다. 그래서 결론은 하나였다. 출혈 원인을 찾으려면 산부인과에 가야 한다.
2. 페리틴이라는 숫자를 처음 알았다
헤모글로빈은 알았는데 페리틴은 처음 들었다. 몸에 저장돼 있는 철의 양을 보여주는 수치다. 헤모글로빈이 지갑에 든 현금이라면 페리틴은 통장 잔고 같은 것이라, 헤모글로빈이 떨어졌다는 건 이미 통장을 다 털어 쓴 뒤라는 뜻이다.
찾아보니 페리틴은 정상 범위 하한선까지만 올려놓고 끝내면 안 된다고 한다. 참고치 하한은 “이 아래면 이상하다”는 선이지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나처럼 출혈이 계속되는 상태면 완충 여유분이 필요해서 더 위쪽까지 채워야 한다.
치료는 철분 주사를 주 1회씩 3회 맞고, 이후 경구 철분제로 전환하기로 했다. 첫 주사 비용은 46,700원. 소견서와 혈액검사 결과지를 받아 나왔다.
3. 생리 기록을 다시 봤다
병원에서 “생리가 어떠세요?”라는 질문을 받을 줄 알고 미리 생리 주기를 정리했다. 최근 여섯 번의 주기가 이랬다.
| 시작일 | 주기 | 출혈 기간 |
|---|---|---|
| 3월 25일 | 41일 | 8일 |
| 5월 5일 | 25일 | 7일 |
| 5월 30일 | 26일 | 6일 |
| 6월 25일 | 17일 | 9일 |
| 7월 12일 | 21일 | 7일 |
| 8월 2일 | — | 10일 |
41일에서 17일까지, 위아래로 널뛰고 있었다. 출혈 기간은 점점 길어져서 마지막엔 열흘이었다. 그 전에는 양은 많았어도 주기가 매우 규칙적이었다.
평균 기록을 보니 “평균 주기 26일, 평균 출혈 7일”이었다. 1년치를 평균 낸 숫자라 최근 몇 달의 변화는 그 안에 묻혀 있었다. 진료 때 요약 화면만 보여줬다면 아무 문제 없어 보였을 것이다. 개별 기록을 따로 정리해서 가져간 게 다행이었다.
출혈량도 그제야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됐다. 그동안 나는 이걸 그냥 “생리가 좀 센 편”인가 갸우뚱하며 고민만 했다.
4. 8월 18일, 오전엔 검진 오후엔 진료
국립암센터로 갔다. 2012년 말에 유방암 진단을 받고 2013년 1월에 수술, 그해 8월까지 항암과 방사선, 이후 타목시펜 5년까지 전부 여기서 했으니 기록이 다 있는 곳이다.
원래는 국민건강보험공단 무료 검진(유방암·자궁경부암)만 예약돼 있었는데, 검진 항목으로는 내 문제를 잡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오후에 산부인과 외래를 따로 잡았다. 자궁경부암 검진은 자궁경부 세포를 보는 것이지 자궁내막이나 근종을 보는 게 아니다. 검진 결과가 정상으로 나와도 내 출혈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이 구분을 미리 알아둔 게 이번에 제일 잘한 일이었다.
5. 자궁이 남자 주먹 두 개 크기라고 했다
초음파를 했다. 화면을 보면서 의사가 말했다. 근종이 다발성으로 있고, 가장 큰 것이 6cm 정도 되고, 자궁 전체가 성인 남성 주먹 두 개를 합친 정도로 커져 있다고.
근종만 떼어내면 안 되냐고 물었다. 안팎으로 너무 많이 퍼져 있어서 다 떼면 자궁이 너덜너덜해진다는 답이 돌아왔다.
사실 몇 달 전부터 아랫배 어딘가가 딱딱하게 만져진다고 느끼긴 했다. 그게 이거였구나 싶었다.
6. 세 가지 선택지
의사가 옵션을 세 개 주고 내가 고르라고 했다.
1. 자궁적출술(복강경)
가장 근본적인 해결. 생리 자체가 없어진다. 원인 제공을 빼는 것이니 제일 깔끔하다고 했다.
2. 생리를 멈추는 호르몬 억제 치료
난소의 여성호르몬 기능을 일시적으로 차단해 근종으로 가는 혈류를 줄이고 생리를 멈추는 방식이다. 그동안 빈혈을 교정할 수 있다. 다만 약을 끊으면 원상복귀다.
3. 빈혈약 먹으면서 버티기
폐경이 멀지 않다면 그때까지 견디는 선택지.
미레나(호르몬 루프)는 처음부터 제외됐다. 유방암 병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권하지 않는다고 했다. 친구들은 다들 미레나를 하라고 했는데, 나에게는 애초에 없는 선택지였다.
지금 상태에서 바로 수술하는 건 조건이 좋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됐다. 헤모글로빈 8.6이면 수술 중 출혈에 대한 여유가 없고 회복도 느리다.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어느 쪽을 택하든, 일단 출혈을 멈춰 수치를 올려놓는 게 먼저다. 2번은 1번의 대안이면서 동시에 1번의 준비 단계이기도 하다.
이 순서를 이해하고 나니 마음이 좀 정리됐다.
7. 임상시험 이야기
호르몬 억제 치료를 한다면 두 가지 경로가 있다. 외래에서 류프로렐린 주사를 맞거나(한 달에 한 번, 20~40만원), 지금 진행 중인 임상시험에 참여하거나.
임상시험은 린자골릭스(다케다가 개발해 유럽에서 시판 중, 국내 미도입)와 류프로렐린(국내 시판)을 비교하는 연구다. 무작위 배정이고 이중맹검이다.
한쪽은 먹는 약이고 한쪽은 주사라 제형이 다르니, 맹검을 유지하려고 모든 참여자에게 주사와 알약을 다 준다. 실제 약 하나에 위약 하나를 짝지어서. 그러니까 어느 군에 배정되든 진짜 치료약은 반드시 들어간다.
일정은 만만치 않다. 최대 65주 계획에 스크리닝 17주, 투약 24주, 추적관찰 24주. 스크리닝 기간에는 생리 첫날부터 닷새 사이에 병원에 와서 질초음파를 받아야 한다. 총 8회 방문. 생리 시작일에 맞춰 평일 휴가를 내야 하는 구조라 회사를 다니면서 하기엔 번거로울 것 같다.
대신 검사 비용(심전도, 혈액검사, 골밀도, 엑스레이)이 전액 지원되고 방문할 때마다 15~17만원을 받는다. 특히 골밀도 검사가 프로토콜에 포함된 게 좋다. 이 계열 약은 골밀도를 떨어뜨릴 수 있어 어차피 필요한 검사다.
문제는 등록 조건이다. 정상 월경 기준이 25~38일인데, 내 최근 여섯 번 중 여기 들어가는 건 두 번뿐이다. 주기가 불규칙해서 진행하다가 탈락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다음 달 생리가 25일 이상 뒤에 시작되면 신청해볼 수 있다고 했다.
8. 9월 15일까지
그날 난소 예비력을 보는 피검사를 하고 나왔다. 난소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폐경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가늠하는 검사다. 신기하다. 그런 걸 피검사만으로도 알아낼 수 있다니…
이 결과가 사실상 내 선택을 결정한다. 난소 기능이 거의 소진 상태면 6개월 호르몬 치료로 폐경까지 다리를 건널 수 있다. 폐경이 오면 근종은 자연히 줄어드니까. 반대로 아직 여유가 남아 있으면 6개월 뒤에 원점이고, 그때는 같은 결정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9월 15일 재진에서 결과를 보고 정하기로 했다. 그때 철 수치도 다시 본다.
진료비는 만 삼천 원이었는데 검사를 몇 개 얹으니 십몇만 원이 나왔다. 그것도 좀 웃겼다.
9.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
솔직히 자궁이 나에게 꼭 필요한가 싶기도 하다. 아이를 낳을 일도 없고, 매달 이 정도로 시달리면서 지킬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
걸리는 건 다른 데 있다. 병원에 간다, 입원을 한다, 수술을 한다 — 이 소식을 엄마가 전했을 때 돌아올 반응이 미리 피곤하다. 마흔 중반에 자궁을 들어낸다고 하면 엄마는 또 자기연민에 슬퍼할 거고, 나는 그 슬픔을 받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내 감정은 그 대화에 낄 자리가 없다.
다행히 순서상 2번이 먼저라, 이 문제는 최소 몇 달 뒤로 미뤄졌다. 지금 당장 다룰 일은 아니다.
호르몬 억제제를 쓰면 살이 찌고 기분 기복이 온다는 것도 안다. 타목시펜 5년은 사실 굉장히 편하게 넘겼는데, 이번에도 그럴지는 모르겠다.
10. 남기는 기준
이번에 제일 뼈아팠던 건 근종 크기도 헤모글로빈 수치도 아니었다.
나는 십 년 넘게 암센터에 성실하게 다녔다. 처음 5년은 반년에 한 번, 그다음은 1년에 한 번, 이후에는 2년에 한 번.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다. 그런데 그 오랜 기간 동안 부인과 초음파는 5~6년 전에 딱 한 번 봤다.
아무도 산부인과에 가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았고, 나도 생리가 규칙적이고 아프지 않으니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유방암 추적관찰은 유방만 본다. 자궁은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공백에서 근종은 조용히 주먹 두 개 크기까지 자랐다.
앞으로는 부인과 초음파를 정기적으로 봐야겠다. 병력이 있든 없든, 마흔이 넘었으면 스스로 챙겨야 하는 항목이라는 걸 이번에 배웠다. “이상이 없으니 안 봐도 된다”와 “아무도 보지 않았다”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나는 그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
9월 15일 결과가 나오면 이어서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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