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은 날씨가 미쳤다.
아침에 호텔에서 나오자마자 하늘을 봤는데 인물 찍을 때가 아니라 하늘을 찍어야 되는 날씨. 이런 날에 오길 잘했다 싶었다. 겨울에 와서 추운 데를 덜덜 떨면서 구경다니고 싶진 않으니까.




아침은 따로 안 먹고 바로 니조시장으로 걸어갔다. 호텔에서 시장까지는 개천을 따라 쭉 내려가면 되는데, 이 개천이 진짜 작다. 청계천보다 작은 것 같은데 물은 엄청 맑고 얕고 유속이 빨랐다. 걷다 보니 가라오케 건물도 있고 가챠가 잔뜩 있는 가게도 있고, 스시 칼 파는 데도 있었다. 어린이집 애들이 줄 지어서 지나가는데 열 명도 안 되는 게 너무 귀여웠다.




시장에 도착해서 해산물 덮밥을 먹었다. 성게, 이크라, 게, 관자, 새우, 오징어가 올라간 걸로.
관자가 진짜 맛있다. 오징어는 향은 덜한데 식감이 좋았고, 밥이 간이 세지 않아서 좋았다. 다른 데 가면 밥이 되게 세잖아.
게는 진짜 너무 맛이 없다, 게.
게딱지랑 게살은 좀 실망이었다. 그것만 빼면 아침부터 이렇게 먹어도 되나 싶을 만큼 잘 먹었다. 게요리는 이걸로 됐다 싶어서 일정에서 뺐다.





나오는 길에 멜론을 4분의 1로 잘라서 파는 집이 있었다. 통으로 파는 데는 오는 길에 많이 봤는데 쪼개서 파는 데는 거기밖에 없었다. 한 통에 2만 2천 원쯤 하는 걸 잘라서 파니까 남겨 먹는 거긴 한데, 언제 한 통을 다 먹겠어. 4분의 1 컷은 괜찮은 시도였다. 하나 사서 호텔 냉장고에 넣어두기로 했다.
그러고 나서 개천을 따라 삿포로역 쪽으로 걸었다. 다 먹고 나온 게 겨우 10시 반이었다. 빨리 먹고 빨리 다니니까 시간이 남는다.




삿포로는 생각보다 조그만 동네였다. 우리가 너무 시내만 도는 걸 수도 있고. 자연 보러 갈 생각은 없으니까 뭐, 이게 최선이지.
역 쪽 백화점이랑 쇼핑몰을 한참 돌았다. 사려고 했던 가방 토폴로지는 편집샵 매장에서 실물을 다 봤는데, 한국에 요즘 신상이 많이 들어와서 굳이 여기서 살 이유가 없어졌다. 그래도 실물을 봤다는 즐거움으로 끝내기로 했다. 성수까지 가야 볼 수 있는 걸 여기서 다 봤으니까.
그러다 둘 다 갑자기 커피가 너무 땡겼다. 아침부터 세 시간을 걸어서 다리가 나갔고, 어디든 앉아야 되는데 앉으려면 뭐라도 시켜야 되니까 급하게 카페를 찾기 시작했다. 5층부터 8층 레스토랑까지 뒤지다가 결국 지하 1층 상가에서 자리 있는 데를 찾았다. 나는 코코넛 밀크커피, 동생은 아이스커피. 애플파이도 하나 샀는데 너무 조그맸다. 커피가 엄청 진해서 좋았다.



앉고 나서 만보기를 봤더니 6천5백 보. 세 시간을 걸었는데 생각보다 안 걸었네.
쉬고 나서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에 들렀다. 아카렌가, 붉은 벽돌 건물. 어차피 호텔 가는 길이니까 슥 지나가자고 했는데, 막상 앞에 서니까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서 들어갔다.
문화재 하나쯤 보고 가는 예의를 차리자.
들어가길 잘했다. 태그를 대면 설명이 뜨는 식으로 전시를 해놨는데, 전시 자체가 아이누 민족부터 시작해서 조몬, 오호츠크, 마츠마에번, 그리고 개척 시대까지 쭉 이어진다. 1800년대 후반부터 개발된 도시니까 백몇십 년밖에 안 된 거고, 그러면 그 역사가 진짜로 식민의 역사와 같이 간 거다. 전시 안내에도 이주와 개척이라는 말이 계속 나온다.
징기스칸이 가게 이름이 아니라 음식 이름이라는 것도 여기서 알았다. 양을 키운 역사 설명 옆에 있더라.
QR이랑 AR은 참 잘 쓴다. 인터넷이 느려서 로딩이 오래 걸린 게 문제였지만.








그리고 여기서 슈퍼마리오 테마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들어갈 때부터 나올 때까지 조형물이 자잘하게 계속 있어서 볼 때마다 사진을 찍었다. 문화재 보러 들어갔다가 마리오랑 같이 찍고 나온 셈이다.



시로이 코이비토 매장도 이 건물 안에 있었다.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파는데 믹스 레귤러 사이즈로 500엔. 어제 먹은 게 600엔이었는데 여기가 더 싸고 양은 더 많다. 어제 것보다 조금 덜 진하긴 한데 그래도 엄청 크리미하다. 바닐라는 연유 맛이 나고 초콜릿은 꿀처럼 진한 맛이 난다. 이 정도 먹는 사이에 녹지도 않는 걸 보면 유지방이 다른 게 맞는 것 같다.
매장에 동전을 넣으면 뭐가 나오는 기계가 있는데, 2천 엔 이상 사면 그 동전을 하나 준다. 과자를 샀더니 받아서 돌려봤고, 별사탕이 나왔다. 그렇게 돈을 많이 쓰고 별사탕을 못 봤다니. 재밌는 경험이었다.



호텔에 들어와서는 그대로 기절했다. 한 시간 넘게 잤다. 발바닥이 빨개진 걸 보고 좀 웃었다. 자고 일어났는데도 아직 대낮인 게 믿기지가 않았다.
저녁은 징기스칸.
어제 걸어가서 예약해둔 집이었다. 화로에 기름 얹고 양파랑 감자랑 고기를 같이 올려 구워 먹는 식인데, 종업원이 미디엄 레어로 구우라고 딱 설명만 해주고 그다음부터는 아무도 안 온다. 알아서 먹으라는 거지.
시킨 건 3종 모둠 2인분, 뼈 붙은 양갈비 1인분, 야채 구이 모둠, 그리고 마무리로 냉면. 밥은 안 시켰다. 3종 모둠에 숄더로인이랑 아이슬란드 램이 들어 있었는데 부위마다 맛이 다 달랐다. 기름 많은 쪽은 육향이 세고, 숄더로인이 제일 담백하다. 양갈비는 바짝 구우니까 갈비 맛이 나고 양 냄새는 코스트코에서 사 먹을 때보다 덜했다.
여기가 제일 담백하고 맛있는 것 같아. 근데 나는 이 어깨 숄더로인이 더 나은 거 같아.
냉면은 국물이 완전 가쓰오부시 맛이고 위에 김치가 올라가는데, 김치라기보다는 단 배추에 가까웠다. 계란이 진짜 맛있었다.
나는 우롱차, 동생은 짐빔 진저 하이볼. 그래서 동생 얼굴이 먹는 내내 시뻘개졌다. 선블록 바른 게 아무 소용이 없다고 놀렸는데 하이볼 때문이었던 걸로 ㅋㅋㅋ
둘이 2인분 조금 넘게 먹고 15만 원쯤 나왔다.








밥 먹고는 또 돌아다녔다. 먼저 쇼핑몰 쪽으로 가서 타워레코드를 한 바퀴 돌았다. 우리 애들 나온 건 없지만 그래도 한 바퀴는 돌아줘야지. 요즘은 포카 사려고 애쓰지 않는다. 들고 다니는 게 너무 귀찮아졌기 때문이지.
그다음엔 폰케이스랑 반지 같은 거 구경하고, 안경 매장에서 리딩글라스를 한참 써봤다. 얼굴에 비해 너무 큰 것들만 걸려서 결국 안 샀다. 다초점은 화면 보다가 순간 토할 뻔했고.
무지도 들렀다. 파우치랑 과자랑 여행용 소품을 한참 봤는데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그러고 로프트를 찾아가는데 이게 한참 헤맸다. 구글맵이 가리키는 데는 영구 폐점이고, 정작 가려던 데는 숙소 바로 옆이었다. 가는 길에 러쉬가 있길래 들어가서 배스밤을 구경했다. 시바견 시리즈, 무민 시리즈, 마리오 루마스까지 있어서 한참 봤다. 사지는 않았다. 몇천 원 태울 바에 그냥 뜨거운 물에 들어가자고 했다.
길에서 당고도 하나 사서 나눠 먹었다. 앙꼬 들어간 걸로. 떡이 좀 짜고 김 맛 비슷한 게 나서 신기했다.







로프트에서는 동생이 경량 우산을 하나 샀다. 112g에 55cm. 나는 이미 있어서 안 샀고, 대신 줄자를 꺼내서 크기를 재줬다. 50cm짜리는 너무 작아서 탈락. 그러고 문구랑 펜 리필이랑 안경 케이스까지 사서 택스 프리로 계산했다.
나와서 오도리공원 쪽으로 걸었는데, 여기서 오텀 페스티벌을 하고 있었다. 천막이 쭉 들어서고 사람들이 다 앉아서 먹고 있는데 분위기가 좋았다. 날짜를 보니 오늘부터 10월 3일까지. 여행 전에 찾아봤을 때는 일정이 미묘하게 안 맞을 것 같다고 나왔는데, 작년 날짜 기준이었나 보다. 다들 속았다.
수프카레만 모아놓은 구역도 있고, 2인 세트에 만 4천 원 하는 데도 있었다. 다코야키랑 교자랑 라면 부스도 있었다. 이미 저녁을 다 먹고 온 게 아쉬웠다.


그래도 아이스크림은 먹었다. 어제 먹었던 데서 또 먹었다. 하루에 하나씩 먹기로 했으니까. 오늘 낮에 먹은 것보다 어제 거가 훨씬 크리미하다. 초콜릿이 어떻게 이렇게 맛있지.
호텔로 들어와서 프런트에 부탁해둔 가습기를 받았다. 한국에서 쓰는 초음파식이나 가열식이 아니라 기화식이었다. 필터에 물을 적셔서 바람으로 날려 보내는 방식이라 김이 안 나오고 바람 소리만 계속 난다. 그래서 처음엔 이게 되는 건가 싶었다. 기계는 진짜 오래돼 보였다.
그러고 14층 스파에 나 혼자 갔다. 동생은 생리 중이라 못 갔다. 다리가 너무 피로해서 어떻게든 풀어야 될 것 같았고, 있는 시설이니까 나라도 체험은 해보자 싶었다.
온탕 하나만 있는 아주 작은 데였다. 그런데 목욕하고 나오니까 해갈용으로 정수기가 있고, 그 옆에 작은 냉동고에 아이스크림 바가 들어 있었다. 이건 좀 좋았다.

돌아와서 냉장고에 넣어둔 멜론을 꺼내 먹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 멜론이 겁나 맛있는 거였다. 달지 않은 꼭지 쪽부터 먹어서 상처받을 뻔했고, 가운데로 갈수록 진짜 부드러워진다.
그러다 오늘이 9월 11일이라는 걸 알았다. 25주기. 대학교 1학년 때였는데.
내일은 시장 쪽에서 점심 먹고 오르골 박물관을 가기로 했다. 아이스크림은 물론 또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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